초혼 7 초혼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동생의 회사 앞에 서 있었다. 이미 퇴근했을 시간인데, 집에서 뭔가 만들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핸드폰을 빨리 마련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 때 회사 건물 건너편의 골목길에서 정우가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정우...야... ”


   나는 너무 반가워서 정우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려고 했지만, 옆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손을 내렸다. 정우의 팔을 붙들고 있는 작은 그림자는 정우가 귀찮다는 듯이 팔을 뿌리치자 다시 쾌활하게 달라붙었다.


   “엇, 진수... 형?”


   “아. 응.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아직 퇴근 안했던 거야?”


   “앗 정우 형 형님 되시나요? 안녕하세요! 아침에 전화했었는데. 반갑습니다. 박성원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침의 그 불쾌한 전화의 주인공이다. 나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고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더 이상 불쾌한 느낌은 없었다. 단지 아침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상할 정도로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직장 후배분인가요?”


   “아니요. 전 아직 졸업도 안했는걸요. 형님은 교수님이시라면서요? 대단하세요! 저는 정우 형 학교 후배. 형이 어찌나 형님 자랑을 해대던지... ”


   “시끄럽다, 박성원.”


   “왜요? 맨날 만나면 진수형 진수형 그러면서. 나도 좀 봐 달라고요-”

   가만히 눈웃음을 치는 폼이 꼭 계집애같다. 뭐 나름대로 귀여운 후배녀석이다. 아침에는 내가 왜 불쾌해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성원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호감이 갔다. 정우를 잘 따르는 것 같고, 선배와 후배는 절친한 사람이 한두명쯤은 꼭 있는 것이 정말로 좋으니까.


   “그럼 나는 이제 형이랑 집에 돌아갈 거니까 알아서 잘 들어가라. 알았지?”


   “에엣? 이제부터 한 잔 하러 가는 것 아니었어요?”


   “한 잔은 개뿔. 집에 가서 퍼 잘거야.”


   왜인지 정우는 조금 불편해 보였다. 안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성원이가 열심히 분위기를 띄우려 했지만 정우는 미간에 주름을 딱 잡고는 요지부동처럼 서 있었다.


   “내일 놀토잖아요. 어디 바에 가서 한 잔 해요. 정 그러면 진수 형님도 같이가요.”


   “아 저는...”


   “괜찮죠, 괜찮죠? 제가 근사한 데를 아니까. 같이 가자구요.”


   성원이는 정우가 꿈쩍도 하지 않자 내 쪽으로 포문을 돌렸다. 장난스레 내 팔에 팔짱을 끼면서 나를 끌고 가는데, 나는 뭐 어쩔 수 없지 하는 심정으로 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내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정우가 뒤에서 내 어깨를 잡는다.


   “알았어. 간다. 됐지? 나 잠깐 형이랑 할 얘기 있으니까 먼저 가.”


   “흐응. 알았어요. 바람맞히면 안 돼요.”


   자그마한 체구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더니 먼저 가 버린다. 정우는 초조한 듯이 입술을 조금 깨물고는 성원이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내 얼굴을 붙잡았다.


   “누구야?”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동생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정우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동생에게 잡혀 있으니 눈알만 도록도록 굴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자 생겼어? 누구냐고! 좋아 죽어?”


   “뭐가? 갑자기 왜 또 이래?”


   “혼자서 이렇게 됐을 리가 없잖아!”


   정우는 내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녀석의 손가락이 스쳐지나갈 때 나는 이상한 이물감을 느꼈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제서야 나는 아까전의 키스로 인해 입술이 부풀어올랐음을 깨달았다. 얼굴에 화악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부끄러웠다. 동생에게 키스마크를 들킨 것 만으로도 이렇게 창피함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정우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입술을 쓰다듬는 동생의 손은 점점 난폭해져갔다.


   “여자일 리가 없어. 네가 여자와 이런 키스를 나눌 수 있을 리 없어. 누구야? 설마... 설마... 김경모 그 자식이야?”


   “정우야, 진정해. 아무 것도 아니야. 별 일 아니었다고.”


   “맞구나! 그 자식... 그 새끼가 그런 거지? 빌어먹을!”


   정우는 주먹을 꽉 쥐고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정우가 손을 쳐들었을 때, 나는 동생이 나를 때리려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우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형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건 나야. 절대 그 놈한테 줄 수 없어."

 

   "정우야. 너 대체 무슨..."

 

   "젠장, 형을 사랑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나는 더 이상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동생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았고, 나는 그 애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정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내 동생이라는 가식적인 말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 심장은 이미 차가워졌다.

 

   "나는... 김경모에게 거역할 수 없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이 열려버렸다. 스스로 말해 버리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내가 김경모에게 거역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그 약 때문이다. 그 약이 내 의지를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사고 이후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내가 김경모에게 거역할 수 없는 것은 그 이상한 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진실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상처입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어째서야! 왜 그 자식한테 거역하지 못한다는 거야!"

 

   "나도 정확하게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너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 존재조차 그에 의해 규정되고 있어. 인지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어젯밤, 네가 나를 붙잡아 주었을 때 나는 내 존재를 겨우 되찾을 수 있었어. 하지만 내 일부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지. 그는 그것을 갖고 있어. 내 존재를 이곳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너는 내 앞에 있을 때 존재하는 거야. 형은, 분명 여기에 있는 거라고! 이렇게나 볼이 따뜻하고, 심장이 고동치고 있는데, 어딘가로 사라지고 만다고? 그렇지 않아! 내가 붙잡겠어. 김경모 따위가 아니라 내가, 이정우가 붙잡겠다고!"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약은 내 자아의 붕괴를 막아주었다. 그것은 확실하다. 어젯밤의 고통을 더 이상 겪고 싶지는 않다. 알 수 없는 곳으로 날려가 버리는 듯한 그 고통.

 

   "...미안하다."

 

   "사랑하지 않는 거지? 그 말,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나는...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이렇게나 빠져버린 걸까."

 

   "정우야."

 

   "빌어먹을, 그래, 네놈은 그런 녀석이었어.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아. 내가 동생이고, 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닌 거지? 그런거야. 넌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는다고! "

 

   "...그래.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어. 부모님도, 너조차도."

 

   "않았...다고...? 그럼 지금은? 지금은 누굴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아주 잘나셨군, 그 김경모 자식을 사랑하는거야? 사랑하는 거냐고!"

 

   나는 정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김경모를, 사랑하느냐고? 사랑하지 않아, 라고 말하려 했지만 한순간 나는 주저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자기파괴적인 감정 따위 나는 가질 능력이 없다.

  

   "아냐. 그 역시 사랑하지 않아.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정우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동생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정우의 어깨를 잡으려 했지만, 정우는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상처입은 표정은 내 가슴을 꿰뚫는 것 같았다. 동생은 그렇게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성원이가 사라진 골목 쪽으로 몸을 돌려 말없이 걸어가 버렸다.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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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나오는 인물들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름이라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기분 탓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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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 6 초혼

 
  전화다. 전화 소리다. 전화벨이 아까부터 미친듯이 울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지만 어젯밤의 고통이 떠올라서 눈살을 찌푸렸다. 눈물 때문에 부어버린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곧 끊어지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전화벨 소리는 끊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정신이 몽롱하다. 나는 간신히 균형을 찾아서는 가까이 있는 전화기까지 기어갔다.

   “네. 이진수입니다.”

   "정우 형 있나요?”

   약간 주저하는 듯 하지만 쾌활한 목소리다. 정우의 후배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부터 전화통이 부숴져라 전화를 걸어대는 데다가 목소리도 너무 친한 척 하는 게 아니꼽다.

   “정우는 회사갔는데. 누구라고 전해줄까요?”

   “아, 아니예요.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핸드폰 번호 알려줄까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같잖은 놈. 나는 혼잣말을 중얼중얼거리며 욕실로 향하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조금, 이상하다. 예전 같았으면 아침에 전화가 걸려 오는 것 정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을 일이다. 나는 일단 친절한 것 외에는 장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남들의 나에 대한 평가는 대개 ‘친절하다’ 나 ‘착하다’ 로 요약되었고, 그것은 내가 위선적으로 친절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진짜로 남들에게 나쁜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모든 사람을 좋아했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나는 그 흔한 뒷담화에도 한 번 끼어 본 적이 없고, 타인의 단점을 찾아내는 것에 있어서는 병적이라고 할 정도로 둔감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걸려 온 전화의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도 만난 적도 말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1분도 채 안 된 짧은 통화를 나눠보고 이렇게 맹렬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이다. 30년 가까이 보아온 내 손. 욕실 거울에 비춰본 내 얼굴도 그대로다. 물론 오늘은 좀 부어서 보기 싫긴 하지만 평생 익숙해진 내 얼굴이다. 하지만 나는 어젯밤의 일을 계기로 무언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원인은 김경모라는 사람이 확실하다. 정확한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내 속의 무언가가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뭔가 찜찜하기도 하고 기분도 별로 좋지 않아서 나는 학교에 갔다. 서무과에 가서 확인을 해 보았지만 별 다른 변동사항은 없었다. 이미 학기는 시작되었고, 연구실에도 빈 자리가 없다는 말밖에 듣지 못했다. 대학교 시절의 친구를 찾아가 번역 일이나 해 볼까 하고 이것저것 물어본 뒤에 거리로 나오자 벌써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친구의 회사에서 조금만 걸으면 청계천이었기 때문에 잠시 쉬었다 가는 것도 괜찮을까 하고 종로를 지나 광교 쪽으로 내려갔다. 청계천에는 이젠 사람이 별로 없었다. 처음 청계천이 열렸을 때 정우 녀석을 끌고 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물을 보러 온 건지 사람에게 깔리려고 온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지무지하게 사람이 많았었다. 담배를 피던 아저씨의 담뱃불이 내 셔츠에 구멍을 내서 정우와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배가 나온 대머리 아저씨였는데, 사과는 커녕 내가 자기 담뱃불을 껐다고 화를 냈다. 이미 어딘가에서 한 잔 하고 온 모양으로, 얼굴이 벌갰다. 나는 괜찮다면서 그냥 지나가려고 했지만, 정우가 갑자기 아저씨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아저씨는 주위 사람들 때문에 넘어지지도 못하고 비틀댔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이 녀석이 당신 재떨인 줄 알아?]

   주위가 온통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정우의 고함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시청앞에서는 시끌벅적하게 공연을 하고 있었고, 큰길 쪽에서는 장사꾼들이 별 소리를 다 내 가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죽는 소리를 하는가 싶더니 정우에게 달려들었다.

   [어, 어, 이러시면 안 돼요. 정우야 너도 그만 해.]

   나는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청년과 아저씨는 팔을 부여잡고 헛발길질을 하고 난리였다. 주위 사람들도 소란 때문에 여기저기 밀리고 치이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내 체격에 중간에 들어가서 싸움을 말릴 수도 없고, 계속 싸우는 것을 놔두면 근처에 쫙 깔린 경찰들이 금새 달려올 것이다.

  [이 새끼, 진수한테 잘못했다고 빌어!]

  [새파랗게 젊은 놈이 똥오줌 못 가리고 입벌리면 다 말이 되는 줄 알아?]

  아저씨는 호기롭게 외쳤지만 상태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술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의 중늙은이를 상대로 정우는 전혀 봐 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술이 마취제 역할을 했는지 얼굴이 엉망이 되어서 코피까지 흘리고 있는데도 영감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냐! 이 대머리 자식아!]

  정우 역시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둘 사이에 약간 틈이 생기자마자 정우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어, 어어, 놔! 놓으라고!]

  [그만 해. 오늘 행사 크게 하니까 주변에 경찰도 많아. 경찰서 가고 싶어?]

  [에이, 썅. 더러워서.]

  대머리 아저씨는 비틀비틀하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먹은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소리를 치며 그 주위를 비켜 지나갔다. 정우도 꽤나 흥분해서는 씩씩대고 있었지만 나는 녀석을 겨우 달래서 그 인파를 빠져나왔다. 아마 그 아저씨는 경찰한테 붙잡혀 갔을거라며 히히덕거리는 동생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수씨?”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늘씬한 윤곽의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경모... 씨?”

  김경모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저녁 7시. 의정부의 병원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족히 한 시간 반은 넘게 걸린다. 퇴근 후에 곧장 이리로 온 것일까? 그리고 왜 내 앞에 나타난 것일까?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우연일 리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는 내게 그는 전에도 보았던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어젯밤에는 괜찮으셨습니까?”

  알고 있다. 그는 내가 어젯밤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다. 그 고통과, 알 수 없는,절대로 나는 알 리 없는 그 모습들. 나는 다리가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두려웠다. 그가 다가오는 것이 싫고, 무섭다.

  정우가 보고 싶다.

  “동생분이 형을 참 좋아하더군요.”

  어느 새 코앞까지 다가온 의사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저도 당신을 참 좋아한답니다.”

  “당신.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어떻게 어젯밤의 일을 아는 거죠?”

   "완벽하게 당신을 가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김경모는 내 말을 무시하고는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손을 밀쳐냈다. 그는 약간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쯤이면 슬슬 약효가 떨어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 했습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겠죠? 자신이 누군지. 무엇인지. 단지 이정우의 형 이진수로 살아가고 있을 뿐 아닙니까? 그것이 진실일까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전혀...”

   “이런 것은 어떠십니까?”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피하기는 커녕, 놀랄 사이도 없이 그는 내 입술을 벌리고 나의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정우와는 전혀 다른, 폭력적인 키스였다. 나는 그에게 잡아먹히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 이성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그의 입술의 느낌이었다. 그의 혀가 내 혀를 휘감았을 때, 나는 그의 어깨를 꼭 붙들 수밖에 없었다. 피할 수 없다. 피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하다.

   “하아, 하... 읍... ”

   나는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강렬한 쾌감에 몸을 맡겼다. 부끄럽게도 나의 목은 자그마한 한숨을 내뱉었고, 나조차도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의 교태가 담겨 있었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느낌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그와의 키스에 심취했다. 불과 같은 그의 입술이 내 아랫입술을 유린할 때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는 내 허리를 감싸더니 가만히 내 몸을 뒤로 젖혔다. 나는 눈을 감고 그가 내 몸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입 속으로 이물질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알약 같은 것이었는데, 내 타액과 섞이자 그것은 끈적끈적한 액체로 변하여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머리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고통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내가 지금 이 곳에 서 있는지 누워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었다.그가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분명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그는 아까의 열정적이고 폭력적인 키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조용히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약효가 빨리 떨어졌어요. 당신 집에 동생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걸로 다시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아까까지의 불안감이 깨끗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내가 변해버렸다는, 더러워졌다는 그 끔찍한 느낌이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억지로 먹인 알약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으로 인해 내가 다시금 이진수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만은 분명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의정부 종합병원에는 김경모라는 의사가 없어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 당신의 눈동자에 매혹되어 아무 것도 바라볼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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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도 절반. 12화 완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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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 5 초혼

 
"어디 갔다 왔어?"

   "병원에 확인하러."

   "뭘 확인해?"

   "정우 네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확인하러 갔다 왔다 이 녀석아!"

   나는 신발을 훌렁 벗어던지고는 동생의 얼굴을 붙잡았다. 역시, 살아 있었던 거구나! 동생의 무사 생존을 확인한 나는 기쁨에 넘쳐서 어제 있었던 일은 없던 것으로 하기로 마음먹고는 앉아 있는 정우를 꼬옥 안았다.

   "아, 아, 이거 놔, 놓으라고."

   정우는 내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뒤틀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와인병을 내밀었다.

   "그거... 어떻게 산 거야?"

   "어떻게 사긴, 내가 요번 학기 학교 쉰다고 해서 돈이 한 푼도 없을 줄 알았어? 자 자! 오늘은 내가 파스타 재료 다 사 왔으니까 제대로 만들어 먹자. 와인도 따고. 아우는 가만히 앉아 계시게나."

   정우는 어이없다는 듯이 내 손에 든 와인과 요리 재료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전에 함께 살 때 내가 요리를 전혀 안 했던 것도 아닌데 마치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본다는 듯이 놀라는 녀석이 귀여웠다. 나는 술을 정우에게 떠 넘기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소스를 만들고 물을 끓이고 재료를 써는 동안 동생은 정말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병원에 갔던 거야?"

   "그래. 너 죽었다고 했던 의사한테 물어보러 갔었지."

   "..."

   "왜?"

   "그 사람, 이름이 뭔데?"

   "김경모. 의정부 종합병원 응급실에 있는 사람인데, 왜?"

   "대체 어떻게..."

   "너 이상하다. 내가 너보고 귀신이라고, 죽은 사람이라고 했을 때는 아니라고 잘만 말하더니 이제 살아있는거 확인하고 왔다니까 왜 그렇게 놀라? 이 형님이 네 말은 안듣고 잘 모르는 사람인 의사선생 말만 들어서 삐졌어?"

   "됐다. 내가 말을 말지. 와인잔 어디 있어?"

   "저쪽 찬장에."

   정우는 달그락거리면서 테이블을 세팅했다. 전에는 함께 식사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녀석인데,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일을 돕는 것을 보니 역시 사고 후에 철이 좀 든 모양이다. 하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 소중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거겠지.

   김이 모락모락하는 파스타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와인도 따르고 조명도 낮추고 나니 제법 동생의 무사 귀환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난다. 정우는 왜 또 신경질이 나는지 잔뜩 볼이 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우야. 너 그러니까 꼭 고등학생 같다. 무슨 사춘기 사내애도 아니고 뭐 때문에 화내는 거야?"

   "화 내는 거 아냐. 형 지금 되게 바보같은 것 알아?"

   "뭐가?"

   "갑자기 돌아와서는 나보고 죽었다고 별 난리를 다 치지 않나, 혼자 형 노릇은 다 하고! 그래놓고 김경몬지 김경뭔지 하는 개뼉다귀같은 의사 말은 철썩같이 믿고는 축하를 한다고? 내가 처음부터 여기 있었지 어디 갔다가 돌아왔어? 축하를 하려면 자기 처지부터 생각해 보는 게 어때?"

   "그거야... 귀신이 자기 입으로 나 귀신이라고 하진 않잖아."

   "도둑 잡는 귀신도 없고 통닭 먹으면서 야구 보는 귀신도 없어."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파스타를 맛있게 먹는 정우의 모습을 보니 그래도 잔뜩 재료를 사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면서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다.

   "야, 한 병 더 따자."

   "한 병밖에 안 사왔는데?"

   "내가 이 집에다가 몰래 숨겨둔 것 있어. 가져올게."

   정우는 약간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베란다로 사라졌다. 어둑한 거실이 왠지 낯설었다. 중간에 유학 기간을 빼고 생각해도 고등학교 때부터 살았으니까 십 년 정도 산 집인데도 부엌 테이블에 앉아서 이렇게 느긋하게 거실을 바라본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그렇게 앉아 있으니 정우가 와인 한 병을 찾아내서 거실로 들어왔다.

   정우 녀석, 왠지 더 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정우의 성장은 고등학교 때 이미 끝났고 그 뒤로 키가 더 자라거나 한 것은 아니다. 훤칠한 키에 몸도 좋아서 항상 계집애들이 쫓아다녔고, 비실비실한 나와는 달리 운동도 열심히 해서 언제나 탄탄한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딱히 이제 와서 동생이 변한 것은 아닌데 왠지 모르게 나는 정우의 모습을 보며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거, 내가 예전에 알바해서 큰 맘 먹고 산 거니까 감사하라고. 아아 이진수같은 바보녀석 입으로 들어가다니 너무한데. 내가 다 마셔버릴까."

   별 말 없이 병을 받아들었다. 코르크를 따자 향긋한 와인향이 확 풍겨왔다. 정우는 의자에 털썩 앉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꽤나 취한 모양인지 자세도 많이 흐트러져 있다.

   "너 취한 거 보니 마시긴 내가 다 마셔야겠는데. 원래 그렇게 술 약했어?"

   내 기억에 동생은 꽤나 노는 놈이었고, 고등학교때부터 술냄새를 풍기고 들어오는 날도 종종 있었다. 그런 동생이 술이 약하다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흐트러진 정우의 모습이 조금은 놀라웠다.

   그리고, 삼십 년 가까이 함께 살아 오면서 처음으로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미안했다.

   내가 왜 정우에게 미안해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미안했다.

   초등학교 때 까지는 사이좋은 형제였다. 우리는 함께 보이 스카우트의 여름 캠프에 가기도 했고 학교도 같이 다녔었다. 동생을 괴롭히는 애들이 있으면 내가 가서 혼내주기도 했고, 같은 여자아이를 좋아하기도 했었다. 동생은 나를 언제나 따랐었고, 나는 동생을 정말로 아끼고 사랑했었다.

   하지만 중학교 때부터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맞춰서 공부를 하는 것이 동생과 함께 어린애 같은 장난질을 하고 다니는 것보다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집에서 조금 떨어진 명문 고등학교에 시험을 보았다. 정우와는 집에서 마주치는 일도 별로 없었다. 정우는 집 근처의 남고에 진학했고,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우리 집은 모범생 아들과 깡패 아들이 함께 있는 집으로 소문이 났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내가 지나가면 친절하게 인사를 하면서 종종 먹을 것을 주시기도 했었지만, 정우는 행여 자신의 아들과 어울릴까 봐 뒤에서 욕을 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내가 그 일로 심각하게 부모님께 화를 낸 적도 있었지만, 사실 그 때도 나는 내 공부가 바빠서 동생이 진짜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어째서 그런 안 좋은 소문을 달고 다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나마 동생이 대학교에 들어간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험생 때 내가 공부를 가르쳐 준다고 했었지만 정우는 됐다고, 나 같은 것한테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매정하게 말했었다. 그 때도 나는 우리 형제 사이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새내기였고, 처음으로 대학교라는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마음껏 하고 있었으니까.

   정우는 흥얼흥얼 익숙한 멜로디를 부르며 잔을 비웠다.

   "나 술 세다! 너같은 비리비리 약골 샌님한테 질수야 없지. 어디 마셔보라구!"

   말하면서 와인 잔을 입에 털어넣는 폼이 꼭 소주를 마시는 것 같다. 나는 그런 정우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역시 술을 마실 때만큼은 형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나는 훌륭한 나의 간 능력에 흡족해하며 잔을 들어올렸다.

   "뭘 봐? 자꾸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면 위험하다고."

   "네가 귀엽게 구니까 그렇지. 내일도 회사 갈텐데 적당히 마셔라."

   "누가 형님 아니랄까 봐서 또 잔소리야. 네 얼굴도 빨갛다. 귀여워, 아주."

   "뭔 소리야. 정우 너 진짜 취했구나."

   "아아니. 전혀 안 취했어."

   정우는 또다시 병을 들어서 한 잔을 더 채우더니 입에 확 들이부었다. 나는 슬슬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동생은 벌떡 일어나더니 거실의 오디오를 켰다. 라카토시의 바이올린이었다.

   "아 깽깽이. 깽깽이 소리 좋다. 야, 이리 와."

   "정우야, 너 취했어."

   "이리 오라니깐!"

   나는 동생의 손에 이끌려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정우는 내 등 뒤로 팔을 돌리더니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느릿 느릿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라카토시 악단은 점점 더 빠르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집시의 고독함과 치명적인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정우는 내 몸을 거의 들어올릴 듯이 강하게 안고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빠른 바이올린의 소리와, 나를 안고 있는 정우의 체향과, 향긋한 와인 향이 감도는 어둑어둑한 거실에서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고 있자니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다. 동생의 팔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탄탄했다. 어쩌자고 이 애는 나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는 걸까?

   "정우야, 정우야, 아파. 팔 좀 풀어."

   "싫어."

   "너 이상하다. 왜 그래?"

   "절대로 놓지 않을거야."

   "형님 어디 안 간다니까? 이것 놔. 아프다고."

   "싫어. 놓으면 사라져 버릴 거잖아."

   "안 사라져. 안 사라지니까, 제대로 얘기 좀 해봐. 왜 그러니?"

   "그 의사 선생하고 만나지 마."

   나는 갑자기 정우가 경모씨를 언급한 사실에 조금 놀랐다. 내가 그에게서 정우의 생존 사실을 확인했다는 얘기는 했지만, 함께 식사를 한 얘기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정우가 그를 아는 것일까? 나는 팔 힘이 조금 느슨해 진 틈을 타서 동생에게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정우는 깜짝 놀라며 다시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까와는 달리 양 팔로 내 몸을 감싸안아서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전화가... 왔었어."  
 
  "...뭐?"

   "그 의사 선생이 집으로 전화했었다고. 김경모라는 자식."

   "경모씨가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래? 나쁜사람 같아 보이진 않던데."

   "경모 씨? 아주 사이 좋으시구만. 그 사람 대체 어떤 사람이야? 내가 다 알아봤어. 의정부 종합병원에 그런 의사는 없다고. 의사가 맞기는 한거야?"

   나는 정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직도 울리고 있는 바이올린 소리가 머리를 휘젓고 있는 것 같았다. 김경모라는 사람이 의정부 종합병원에 없는 의사라고? 하지만 내게 정우에 대해 알려준 간호사는 김경모 선생을 찾아가 보라고 했었다. 그리고 응급실 닥터 사무실에서 그를 보았다. 금테 안경을 쓰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흰 가운의 닥터. 의사가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의사 맞는데. 간호원이 그랬다고. 응급실의 김경모 선생을... 찾아가... 보라고... 으, 으윽!"

   순간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결과적으로 정우의 가슴을 들이받은 꼴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정우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형, 형! 왜 그래? 이진수! 괜찮아?"

   정우는 내 어깨를 조심스레 잡고는 걱정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런 동생의 배려 따위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다. 머릿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환상이 눈 앞을 스쳐지나가고, 그야말로 사고 당시의 기억 같은 엉망진창인 생각들이 뇌 속을 헤집고 있었다.

   "으으윽! 아악! 아아아!"

   나는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김경모, 그 의사의 서늘한 미소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 사람이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울 리가 없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의 생각이 떠오를 리가 없다.

   환상, 환상이다. 흰 가운. 금테 안경.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 매서운 눈매. 아름다운 손가락. 마지막에 얼굴에 떠올랐던 그 미소. 단정한 몸놀림. 흰 가운. 금테 안경.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 매서운 눈매. 아름다운 손가락. 마지막에 얼굴에 떠올랐던 그 미소. 날이 선 듯 반듯했던 흰 가운. 햇빛에 빛나던 금테 안경. 단정하게 빗어넘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흐트러져 있던 머리칼. 매섭지만 서글퍼 보이는 눈매. 반지가 없던 아름다운 손가락. 마지막에 얼굴에 떠올랐던 알 수 없는 묘한 미소. 김경모의 환상이 나를 압도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당신의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들었던 적이 없는 말이다. 누구의 말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들은 기억이 없다. 누가 한 말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뇌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알몸뚱이로 내던져져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장소에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무기력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들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을, 갖고 싶습니다. 당신의 그 눈동자를 가지고 싶습니다.]

   당신은 누구야?

   고통은 이미 멈췄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불쾌했다. 온 몸 가득 이질감이 느껴졌다. 머리카락 한올 한올까지 유린당하고 있다는 느낌에 절망했다. 나는 이진수가 아니다. 나는 객체이며, 관계의 주체가 아니며, 아무 것도 아니다.

   그때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는 내 눈가에 머물렀다. 이마와, 볼과, 목에 느껴지는 온기에 나는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따스한 그것은 내 마음 속 깊은 곳을 달래주고 있었다. 점차 떨림이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간신히 기운을 추스리고 내가 주저앉아 있는 내 집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정우였다. 정우는 눈물이 흐른 내 얼굴에 정성스레 키스를 하고 있었다.

   이 온기는 동생의 것이었을까. 나는 정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정우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째서 나 같은 것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정우의 키스는 따스했다. 눈가에, 볼에, 이마에 와 닿는 동생의 온기는 더러워진 내 몸을, 영혼을 치유해 주는 것 같았다.

   "으흑, 흐흐흑..."

   "형, 왜그래. 왜 울어. 그 사람 때문이야? 아니면... 나 때문이야?"

   "아냐. 정우야, 너 때문이 아냐."

   정우는 다정하게 나를 안았다. 따스한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것 같다.

   "무서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게 무서워. 난 누구야? 난 뭐지?"

   "너는 내 형이야. 이진수. 내 앞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 무서워 하지 마. 내가 있을 테니까. 절대로,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던 상관없어. 이렇게 내 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야."

   나는 필사적으로 정우를 끌어안았다. 몸의 떨림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김경모의 환상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렇게 동생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정우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등을 쓸어 주었다. 동생의 손길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조금은 안심하고, 또 조금은 불안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나를 말하는 것일까?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멍하니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우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꿰뚫을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부모님, 내 동생, 초등학교 때 옆집에 살던 누나도 좋아했었고, 같은 반 반장도 좋아했었다. 대학교에 올라와서는 여자한테 차이고 술도 마셨었다. 하지만, 진정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과연 부모님을 사랑하긴 했는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어떠한 기분이 들었는가? 내가 정말 정우를 사랑하는 걸까? 정우가 죽어버린 줄 알았을 때 느꼈던 그 상실감은 정우를 사랑하는 내 마음의 표현이었던 게 맞는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눈동자.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내 마음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사랑없는 내 눈동자의 모습인 것일런지도 모른다.

  정우는 나를 부숴지기 쉬운 유리처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나는 동생의 품에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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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라카토시, 가장 좋아하는 집시바이올리니스트. 테마는 헝가리안 무곡 5번

이글루스 가든 - BL 소설을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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