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동생의 회사 앞에 서 있었다. 이미 퇴근했을 시간인데, 집에서 뭔가 만들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핸드폰을 빨리 마련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 때 회사 건물 건너편의 골목길에서 정우가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정우...야... ”
나는 너무 반가워서 정우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려고 했지만, 옆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손을 내렸다. 정우의 팔을 붙들고 있는 작은 그림자는 정우가 귀찮다는 듯이 팔을 뿌리치자 다시 쾌활하게 달라붙었다.
“엇, 진수... 형?”
“아. 응.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아직 퇴근 안했던 거야?”
“앗 정우 형 형님 되시나요? 안녕하세요! 아침에 전화했었는데. 반갑습니다. 박성원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침의 그 불쾌한 전화의 주인공이다. 나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고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더 이상 불쾌한 느낌은 없었다. 단지 아침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상할 정도로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직장 후배분인가요?”
“아니요. 전 아직 졸업도 안했는걸요. 형님은 교수님이시라면서요? 대단하세요! 저는 정우 형 학교 후배. 형이 어찌나 형님 자랑을 해대던지... ”
“시끄럽다, 박성원.”
“왜요? 맨날 만나면 진수형 진수형 그러면서. 나도 좀 봐 달라고요-”
가만히 눈웃음을 치는 폼이 꼭 계집애같다. 뭐 나름대로 귀여운 후배녀석이다. 아침에는 내가 왜 불쾌해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성원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호감이 갔다. 정우를 잘 따르는 것 같고, 선배와 후배는 절친한 사람이 한두명쯤은 꼭 있는 것이 정말로 좋으니까.
“그럼 나는 이제 형이랑 집에 돌아갈 거니까 알아서 잘 들어가라. 알았지?”
“에엣? 이제부터 한 잔 하러 가는 것 아니었어요?”
“한 잔은 개뿔. 집에 가서 퍼 잘거야.”
왜인지 정우는 조금 불편해 보였다. 안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성원이가 열심히 분위기를 띄우려 했지만 정우는 미간에 주름을 딱 잡고는 요지부동처럼 서 있었다.
“내일 놀토잖아요. 어디 바에 가서 한 잔 해요. 정 그러면 진수 형님도 같이가요.”
“아 저는...”
“괜찮죠, 괜찮죠? 제가 근사한 데를 아니까. 같이 가자구요.”
성원이는 정우가 꿈쩍도 하지 않자 내 쪽으로 포문을 돌렸다. 장난스레 내 팔에 팔짱을 끼면서 나를 끌고 가는데, 나는 뭐 어쩔 수 없지 하는 심정으로 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내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정우가 뒤에서 내 어깨를 잡는다.
“알았어. 간다. 됐지? 나 잠깐 형이랑 할 얘기 있으니까 먼저 가.”
“흐응. 알았어요. 바람맞히면 안 돼요.”
자그마한 체구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더니 먼저 가 버린다. 정우는 초조한 듯이 입술을 조금 깨물고는 성원이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내 얼굴을 붙잡았다.
“누구야?”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동생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정우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동생에게 잡혀 있으니 눈알만 도록도록 굴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자 생겼어? 누구냐고! 좋아 죽어?”
“뭐가? 갑자기 왜 또 이래?”
“혼자서 이렇게 됐을 리가 없잖아!”
정우는 내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녀석의 손가락이 스쳐지나갈 때 나는 이상한 이물감을 느꼈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제서야 나는 아까전의 키스로 인해 입술이 부풀어올랐음을 깨달았다. 얼굴에 화악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부끄러웠다. 동생에게 키스마크를 들킨 것 만으로도 이렇게 창피함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정우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입술을 쓰다듬는 동생의 손은 점점 난폭해져갔다.
“여자일 리가 없어. 네가 여자와 이런 키스를 나눌 수 있을 리 없어. 누구야? 설마... 설마... 김경모 그 자식이야?”
“정우야, 진정해. 아무 것도 아니야. 별 일 아니었다고.”
“맞구나! 그 자식... 그 새끼가 그런 거지? 빌어먹을!”
정우는 주먹을 꽉 쥐고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정우가 손을 쳐들었을 때, 나는 동생이 나를 때리려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우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형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건 나야. 절대 그 놈한테 줄 수 없어."
"정우야. 너 대체 무슨..."
"젠장, 형을 사랑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나는 더 이상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동생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았고, 나는 그 애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정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내 동생이라는 가식적인 말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 심장은 이미 차가워졌다.
"나는... 김경모에게 거역할 수 없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이 열려버렸다. 스스로 말해 버리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내가 김경모에게 거역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그 약 때문이다. 그 약이 내 의지를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사고 이후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내가 김경모에게 거역할 수 없는 것은 그 이상한 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진실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상처입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어째서야! 왜 그 자식한테 거역하지 못한다는 거야!"
"나도 정확하게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너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 존재조차 그에 의해 규정되고 있어. 인지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어젯밤, 네가 나를 붙잡아 주었을 때 나는 내 존재를 겨우 되찾을 수 있었어. 하지만 내 일부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지. 그는 그것을 갖고 있어. 내 존재를 이곳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너는 내 앞에 있을 때 존재하는 거야. 형은, 분명 여기에 있는 거라고! 이렇게나 볼이 따뜻하고, 심장이 고동치고 있는데, 어딘가로 사라지고 만다고? 그렇지 않아! 내가 붙잡겠어. 김경모 따위가 아니라 내가, 이정우가 붙잡겠다고!"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약은 내 자아의 붕괴를 막아주었다. 그것은 확실하다. 어젯밤의 고통을 더 이상 겪고 싶지는 않다. 알 수 없는 곳으로 날려가 버리는 듯한 그 고통.
"...미안하다."
"사랑하지 않는 거지? 그 말,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나는...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이렇게나 빠져버린 걸까."
"정우야."
"빌어먹을, 그래, 네놈은 그런 녀석이었어.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아. 내가 동생이고, 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닌 거지? 그런거야. 넌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는다고! "
"...그래.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어. 부모님도, 너조차도."
"않았...다고...? 그럼 지금은? 지금은 누굴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아주 잘나셨군, 그 김경모 자식을 사랑하는거야? 사랑하는 거냐고!"
나는 정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김경모를, 사랑하느냐고? 사랑하지 않아, 라고 말하려 했지만 한순간 나는 주저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자기파괴적인 감정 따위 나는 가질 능력이 없다.
"아냐. 그 역시 사랑하지 않아.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정우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동생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정우의 어깨를 잡으려 했지만, 정우는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상처입은 표정은 내 가슴을 꿰뚫는 것 같았다. 동생은 그렇게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성원이가 사라진 골목 쪽으로 몸을 돌려 말없이 걸어가 버렸다.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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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나오는 인물들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름이라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기분 탓 입니다.
이글루스 가든 - BL 소설을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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